전시회의 하이라이트
1장 폼페이의 시가지——공공시설과 종교
2장 폼페이의 사회와 사람들의 활약
3장 사람들의 생활: 식생활과 경제활동
4장 폼페이 번영의 역사
5장 발굴의 과거와 현재
1장 폼페이의 시가지——공공시설과 종교
폼페이는 동서 1,600m, 남북 800m 정도의 중규모 도시로, 동서로 2개, 남북으로 1개의 대도로가 뻗어 있었다. 인구는 약 1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도시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던 것이 시가지의 인프라와 공공시설이다. 폼페이의 시가지에도 포럼(중앙 광장), 극장, 원형 경기장, 목욕탕, 운동장과 같은 공공시설이 있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프레스코화에 담겨 있다. 수도 시설도 정비되어 시내 곳곳에 마련된 공동 수도, 공중 목욕탕, 부유층의 주택으로 상수가 공급되었다. 시의 중심부에는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자리잡아 공적인 제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
비키니 모습의 베누스
대리석(채색·금채의 흔적이 있음), 눈: 유리
베누스가 목욕하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샌들을 벗으려는 미의여신을 프리아포스와 쿠피도가 받치고 있다. 장신구를 표현한 금채와채색이 남아 있다. 저택의 중앙홀에 있던 수반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
TOP
2장 폼페이의 사회와 사람들의 활약
유복한 시민들은 저택을 호사스럽고 창의가 넘치는 장식으로 꾸몄으며 연회 자리에는 화려한 식기가 늘어섰다. 이러한 장식과 가재도구, 생활 모습을 통해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교양인답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도시의 주민 중에는 노예도 많았다. 폼페이는 빈부 격차가 심한 양극화 사회였는데, 계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치고는 유동성이 높았다. 실제로 도시의 자산가 중에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금융업으로 부를 쌓은 해방 노예 일가와 사업 수완으로 생계를 영위한 여성이 존재했던 사실이 알려져 있다.
 |
포도 수확을 나타낸 소형 암포라
(일명 "푸른 항아리")
카메오 글라스
감청색의 유리 위에 백색 유리를 덧입힌 카메오 글라스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불필요한 부분을 파내고 남은 백색 유리층이 정교한 부조로 나타나 있는데, 포도를 따서 와인을 만드는 데 열중하는 쿠피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TOP
3장 사람들의 생활: 식생활과 경제활동
폼페이의 주민은 제조업, 건설업, 소매 및 요식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도시 전체에서 600곳 이상의 가게와 공방이 발굴되었다. 노점상, 행상인, 육체노동자도 많았고 목수와 미장공의 도구, 벽화가의 도구, 의료기구 등 전문적인 직종과 관련된 유물도 발견되었다.
시내에는 빵집과 포장 가능한 음식점도 있어 사람들은 밖에서 간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부유한 집에는 주방이 갖춰져 있어 고용인들이 조리한 호화로운 식사가 제공되었다. 농산물과 수산물 가공도 왕성하여 폼페이산 와인, 올리브유, 가룸(생선을 소금에 절인 양념)이 각지로 수출되었다.
시내 빵집의 모습을 그린 한 장면. 폼페이 전체에 약 30곳의 빵집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이 그림은 고위 공직자가 빵을 베푸는 광경 또는 정치적 선전의 목적으로 빵을 나눠주는 인물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TOP
4장 폼페이 번영의 역사
폼페이가 도시로서 크게 발전한 것은 기원전 2세기 삼니움족 시대 때다. 동지중해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폼페이에도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내렸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가 대두하자 폼페이는 기원전 80년에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었다. 이후 폼페이의 사회와 문화는 로마화의 물결에 떠밀려 갔다.
<파우누스의 집>, <키타라 연주가의 집>, <비극 시인의 집>의 출토품은 폼페이의 중층적인 역사를 말해준다. <파우누스의 집>은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저택으로, 헬레니즘 미술 굴지의 모자이크 장식이 남아있다. <키타라 연주가의 집>은 로마 문화가 황금기를 맞이한 무렵의 프레스코화가, <비극 시인의 집>은 화산 폭발 직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알려져 있다.
 |
춤추는 파우누스
청동
<파우누스의 집>의 아트리움을 장식한 상징적인 조각상인데, 실제로는 그리스 신화의 사티로스를 나타낸 것이다. 관이 두 개로 된 은제 피리를 손에 들고 연주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사티로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쾌활한 추종자이다.
|
TOP
5장 발굴의 과거와 현재
베수비오산의 분화로 매몰된 에르콜라노(헤르쿨라네움), 폼페이, 솜마 베수비아나의 세 유적을 조명하여 18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발굴의 역사를 짚어본다. 과거의 발굴은 미술품을 손에 넣기 위한 ‘보물찾기’식이었으나, 현재는 엄밀하고 신중한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1960년대부터는 유적의 보호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연구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건물과 출토물의 보존 및 수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TOP
*게재 작품은 모두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입니다.
Photos©Luciano and Marco Pedic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