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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다실

정원

도쿄국립박물관의 본관 북쪽으로 펼쳐진 정원은 연못을 중심으로 5채의 다실을 배치하여, 계절마다 꽃과 단풍으로 어우러지는 휴식 공간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동식물 연구부문인 ‘덴산부(天産部)’의 영향으로 희귀 나무와 들풀이 심겨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또,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호류지에 헌납한 오층탑과 석비, 등롱 등이 정원에 남아 있습니다.

슌소로

슌소로(春草廬)

에도시대에 가와무라 즈이켄(1618-1699)이 셋츠요도가와 개수공사 때 세운 휴게소로, 그후 오사카로 이축되었고 다시 하라 산케이(1863~1939)에 의해 요코하마의 산케이엔으로 이축된 후에 1937년에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 있는 마쓰나가 야스자에몬(1875~1971)의 야나세소(柳瀬荘)로 이축되었습니다. 1948년에 야나세소의 기증을 받아 1959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축되었습니다. 팔작지붕의 한쪽 벽에 걸린 슌소로의 편액은 서예가로 알려진 만슈인료죠호 친왕(1622~1693)의 글씨로, 산케이가 마쓰나가에게 증정한 것입니다. 목조 단층건물이며 팔작집, 초가지붕, 다실은 5畳와 3畳로 돼 있습니다.

덴고안

덴고안(転合庵)

고보리 엔슈(1579~1647)가 가쓰라노미야로부터 찻그릇인 ‘오다이묘’를 하사받았을 때 그를 알리기 위해 교토 후시미의 로쿠지조에 세운 다실입니다. 1878년 교토 오하라의 쟉코인(寂光院)에 전해져 내려온 덴고안을 와타나베 기요시(후쿠시마 현령, 후쿠시마현 지사, 남작)가 물려받아 도쿄 아자부구 가스미초로 이축하였습니다. 그후 미하라 시게키치(닛폰유센 사원, 우키오에 수집가)로 소장자가 바뀌었습니다. 미하라가 ‘오다이묘’도 손에 넣음으로써 덴고안과 인연이 있는 ‘오다이묘’가 이곳에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후 시오바라 마타사쿠(현 다이치산쿄 창업자)를 거쳐 그의 부인 시오바라 지요로부터 1963년에 찻그릇과 함께 기증받았습니다.
로쿠소안

로쿠소안(六窓庵)

게이안 시대(1648-1652)에 나라의 고후쿠지 지겐인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고후쿠지 다이죠인에 있다가 현재의 나라국립박물관으로 이전된 핫소안(八窓庵), 도다이지닷추시쇼보(東大寺塔頭四聖房)의 오키로쿠(隠岐録)와 함께 야마토의 3대 다실이라고 불렸습니다. 1875년에 박물관이 구입하여서 해체 수송 중에 이즈에서 배가 난파되었지만 다행히도 재료의 유실은 면하여 1877년에 이곳으로 이축되었습니다. 그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재차 해체되어 이전되었으나 1947년 9월에 스키야의 명공인 기무라 세이베에 의해 현재 위치에 재건되었습니다. 팔작집, 초가지붕, 산조다이메데로(三畳台目出炉)로 가나모리 소와의 취향이 반영되었고 水屋(준비실), 寄付(대기실), 의자 등은1881년에 고히쓰 료추에 의해 설계・증축되었습니다.
출입구에 있는 조즈바치(手水鉢)는 시호부쓰스이반(四方仏水盤)이라고 불리는 형식으로, 925년에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건립한 호쇼지 석탑의 하나였습니다. 그후 긴카쿠지를 거쳐 소유자가 몇 차례 바뀐 후에 1885년에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오쿄관

오쿄칸(応挙館)

오와리노쿠니(현재 아이치현 오하루초)의 천태종 사찰 묘겐인의 서원으로서 1742년에 세워져, 후에 도쿄 시나가와의 마스다 다카시(1848~1938)의 저택으로 이축되었다가 도쿄국립박물관으로 기증되어 현재 위치로 이축되었습니다. 실내에 그려진 묵화는 1784년에 마루야마 오쿄가 눈병으로 묘겐인에 머물었을 때 그린 것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나무를 그린 바닥재가 남아있습니다.
묵화는 보존상의 이유로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지만 2007년에 최신 디지털 화상처리기술과 인쇄기술을 구사한 복제 벽화가 설치되어 오쿄가 그린 당시의 그림공간이 오쿄관에 재현되어 있습니다.
목조 단층건물, 팔작지붕, 기와집, 가로 15m, 세로 9m, 2실, 복도가 둘러져 있습니다.
구조관

구조칸(九条館)

원래 교토 고쇼 안의 구죠저택에 있던 것을 도쿄 아카사카의 구조저택으로 이축한 건물로, 주인의 거실로 사용되었습니다. 1934년에 구조가문의 기증을 받아 현재 위치로 이축되었습니다. 바닥재와 장지문 등에는 가노파의 로카쿠산스이즈(楼閣山水図)가 그려져 있고 교창에는 모과나무판에 후지하나비시(藤花菱)가 투조되어 있습니다.
목조 단층건물, 기와집, 우진각지붕, 가로 15m, 세로 10m, 2실, 복도가 둘러져 있습니다.

문화재, 기념비

五重塔

오층탑

높이 5.7m의 구리탑. 최상부 상륜에는 용이 휘감고 있고 서까래와 지붕받침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기단에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1646~1709)가 호류지에 봉납했다는 의미의 ‘大和国 法隆寺 元禄元年十二月日 常憲院 徳川綱吉’라고 새겨 있습니다. 쓰나요시가 살아 있을 때는 원호와 세속명을 병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후 봉납 때 연호와 시주의 명문이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第二回内国勧業博覧会の碑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 기념비

메이지 정부는 산업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서 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제1회부터 3회까지는 우에노 공원에서 개최하였습니다. 1877년 제1회 박람회에서는 본관 북쪽의 발코니 근처에서 일본 최초의 미술관이 벽돌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이 미술관의 앞쪽에는 조사이어 콘더(영국 1852~1920)가 설계한 박물관의 옛 본관이 세워졌으며 이는 1881년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제1회의 전시 기간은 102일로 입장객 수는 45만 명이 넘었으며, 제2회는 122일간 82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습니다. 박람회는 산업 진흥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작품 또한 출품되어 미술계의 진흥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참고로 박람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특별히 책정된 구입예산으로 박물관에 매입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메이지시대 공예 컬렉션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도쿄국립박물관에 기념비가 남아있는 것은 제2회 박람회가 유일합니다.
町田久成の碑

마치다 히사나리(町田久成)의 현창비

초대 박물관장인 마치다 히사나리(1838~1897)의 현창비입니다. 마치다 히사나리는 1838년에 현재의 가고미사현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에 에도(현재 도쿄)로 와서 공부를 한 후에 1865년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대영박물관 등을 둘러보고는 일본에 박물관을 창설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귀국한 후에 초대 박물국장으로서 일본 박물관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문화재 조사와 보호를 제창하고 자신의 재산을 바쳐서 서예품과 고미술품을 사들여 문화재 보전에 진력하였습니다. 1882년에 퇴직한 후에는 불교에 입문해 1897년 9월 15일에 우에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寛永寺 津梁院에 묘가 있습니다.
陶製の燈籠

도제 등롱

제4대 기요미즈 로쿠베(1848~1920) 작품으로 1908년이라는 명문이 있습니다. 1938년에 제5대 로쿠베로부터 기증되었습니다.
有馬家の墓石

아리마 가문(有馬家)의 묘석

도쿄국립박물관은 간에이지 부지내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정원도 간에이지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중 하나가 에치젠마루오카번의 번주였던 아리마 가문의 묘석입니다. 기록에는 1882년부터 1886년에 걸쳐 공원으로 정비하기 위하여 박물관 부지내에 묘소가 조성되었다고 돼 있습니다. 이 묘석들만 여기 남겨진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鉄燈籠

철제 등롱

석대 위에 앉힌 철제 등롱. 화로에는 소나무 껍질 무늬를 투조하고 석대에는 구름을 나는 용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철제라서 녹이 많이 슬고, 1982년 1월의 태풍으로 석대 윗부분이 떨어져 현재는 각 부분을 나누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단만 옛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명문은 없지만 제작자는 찻주전자 장인으로 유명한 에도 나고시 가문의 6대째 나고시 겐푸쿠(1819년 몰)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